노동이 재화생산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상품이나 흔히 ‘노동력’으로 불리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취급되는 오도(誤導)를 더 이상 방치해선 위험하다는 국제적 공감대가 이미 60여 년 전에 다져졌던 것이다. 40년 만에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로 논란이 더욱 거세진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징용과 위안부 동원의 처절한 교훈도 여기에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이주노동자 상품취급 현실-

태국 여성 노동자들이 노말헥산이라는 생경한 공업용 유기용제에 집단중독돼 앉은뱅이병으로 일컬어지는 다발성 신경장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른 노동착취는 노동을 상품쯤으로 여기는 19세기의 철학이 한국의 고용주들을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마르크스 이론을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구시대 유물로 타매하는 이들이야말로 아직 마르크스가 살아있는 시절로 착각하는 듯하다. 산업노동자가 고용주에게 팔리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던 것은 19세기 초반의 일이다.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주인공 ‘블랑카’로 대표되는 한국 속의 이주노동자들에겐 ‘노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소명이다’라는 거창한 구호가 허울좋은 사치품에 불과한 지 오래다. 그들은 그저 “때리지 말고 말로 하세요. 우리는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에요”라는 수준의 푸대접만이라도 면하고 싶은 것이다.

18만여명에 이르는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월급을 넉넉하게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최소한의 건강과 안전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열악성에 치를 떤다. 하루 8시간이 아닌 14시간 안팎의 준 노예노동, 그것도 쉴 틈조차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이곧대로 믿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병원에 보내달라는 눈물어린 호소마저 받아들여지지 않는 매몰참에서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라는 낱말을 떠올리게 한다. 8년여 전에 선진국 클럽에 해당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의 일그러진 단층이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선진형 정부기관까지 갖춘 나라라고 명함을 내밀기가 부끄럽다.

정부당국이 뒤늦게 악덕 고용주와 관련자들을 형사처벌하고 비슷한 업체에 대한 특별점검에 나서며 부산을 떠는 것으로 마무리될 일은 결코 아니다. 불법체류자 단속이나 강제추방에만 익숙하던 정부의 땜질식 점검으로는 사태재발을 막기가 쉽지 않다.

-‘모두의 잘못’ 인식 확산돼야-

열성적인 시민단체와 지극정성인 몇몇 개인의 힘만으론 악덕 업주 감시와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일이 온전하게 열매를 맺기 어렵다. 노동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인권위 등도 소매를 걷고 나서야 할 일은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한 중소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자리잡아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신성한 ‘노동자’다. 인종적 편견, 임금체불, 인권유린의 유혹을 떨쳐 버릴 때가 지났다. ‘인권사각지대’ ‘몰지각한 악덕기업주’ ‘추한 한국’ 같은 상투적인 용어가 자주 등장하지 않도록 할 책무가 공동체적 삶을 살아야 할 우리 모두의 어깨에 드리워져 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라며 쓰디쓴 웃음을 짓게 하는 블랑카 개그의 미래진행형은 더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낯선 땅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려는 순박한 눈망울의 이주노동자들이 ‘그들이 아닌 우리들’로 다가서게 해야 한다. 어마어마한 지진 해일 피해를 입은 남아시아 국가들의 불행이 이미 그들만이 아닌 우리의 문제가 되었듯이 말이다.

〈김학순 미디어칸 대표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