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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도요안 신부 `이주노동자 돕기' 한국사랑 | `한국 노동운동의 산증인' 도요안 신부..한국 노조 변화도 주문
(서울=연합뉴스) 박상돈 기자 = `한국 노동운동의 산증인' 도요안 신부(68ㆍ미국명 존 트리솔리니)의 노동자에 대한 사랑이 이주노동자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28일 명동성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40년 가까이 한국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해온 도 신부는 이제 자신이 설립한 천주교 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관계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및 복지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도 신부는 1959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인연으로 사제 서품 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영등포 공장촌에 자리를 잡으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해 40년 가까이 한국의 산업화와 발전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런 도 신부가 이제는 1960∼19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그대로 되물림당한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의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우선 임금을 떼인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사목위원회 사람들이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부당함을 호소할 때면 이들을 격려하고 지도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외국인 할아버지가 직접 사업장을 찾으면 차마 그냥 보내지 못하고 떼인 임금을 주는 사업장도 있어, 몇년 전까지 본인이 직접 이 일에 나섰지만 이제는 외국인이 너무 관여한다는 비난을 살까봐 자제하고 있다.
도 신부는 이른바 `3D업종'에 근무하면서도 큰 차별을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한국은 일본처럼 고령화ㆍ저출산 사회에 이르러 3D 작업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외국인 노동자를 사람이 아닌 일종의 생활용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네팔 노동자는 한국에서 무려 13년이나 일해 한국 사람이나 마찬가지 인데도 내몰릴 위기에 있다"며 "좀 쓰다 내버리고 새 사람을 들여오는 이런 방식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현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서 "한국의 노조가 시대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갈수록 노조 구성 비율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을 모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도 신부는 1959년 선교사로 파견돼 경기도 광주 살레시오고교에서 영어 교사로 사목실습을 하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고,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고(故) 전태일씨 분신사건 이듬해인 1971년에는 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노동사목위원회를 설립하고, 1986년 종로성당에 노동사목회관을 마련하는 등 노동자 복지와 인권을 위해 애써왔다.
지난해에는 척추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3월1일 생일을 앞둔 도 신부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오랜 기간 함께 지낸 아이들이 훌륭한 시민이 되고 가족을 이루고, 또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동안 결혼식 주례만 800차례 해줬다"며 "그렇게 길에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보람이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kak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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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도요안 신부 `이주노동자 돕기' 한국사랑 | `한국 노동운동의 산증인' 도요안 신부..한국 노조 변화도 주문
(서울=연합뉴스) 박상돈 기자 = `한국 노동운동의 산증인' 도요안 신부(68ㆍ미국명 존 트리솔리니)의 노동자에 대한 사랑이 이주노동자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28일 명동성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40년 가까이 한국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해온 도 신부는 이제 자신이 설립한 천주교 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관계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및 복지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도 신부는 1959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인연으로 사제 서품 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영등포 공장촌에 자리를 잡으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해 40년 가까이 한국의 산업화와 발전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그런 도 신부가 이제는 1960∼19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그대로 되물림당한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의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우선 임금을 떼인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사목위원회 사람들이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부당함을 호소할 때면 이들을 격려하고 지도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외국인 할아버지가 직접 사업장을 찾으면 차마 그냥 보내지 못하고 떼인 임금을 주는 사업장도 있어, 몇년 전까지 본인이 직접 이 일에 나섰지만 이제는 외국인이 너무 관여한다는 비난을 살까봐 자제하고 있다.
도 신부는 이른바 `3D업종'에 근무하면서도 큰 차별을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한국은 일본처럼 고령화ㆍ저출산 사회에 이르러 3D 작업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외국인 노동자를 사람이 아닌 일종의 생활용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네팔 노동자는 한국에서 무려 13년이나 일해 한국 사람이나 마찬가지 인데도 내몰릴 위기에 있다"며 "좀 쓰다 내버리고 새 사람을 들여오는 이런 방식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현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서 "한국의 노조가 시대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갈수록 노조 구성 비율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을 모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도 신부는 1959년 선교사로 파견돼 경기도 광주 살레시오고교에서 영어 교사로 사목실습을 하면서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고,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고(故) 전태일씨 분신사건 이듬해인 1971년에는 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노동사목위원회를 설립하고, 1986년 종로성당에 노동사목회관을 마련하는 등 노동자 복지와 인권을 위해 애써왔다.
지난해에는 척추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3월1일 생일을 앞둔 도 신부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오랜 기간 함께 지낸 아이들이 훌륭한 시민이 되고 가족을 이루고, 또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동안 결혼식 주례만 800차례 해줬다"며 "그렇게 길에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생애 최고의 보람이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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